일상 속에서 만나는 작은 '혁명'
 
농성 30일째를 맞은 광화문역 농성장
대구 중증장애인 방문, 농성 이어가

2012.09.19 00:00 입력

 

▲농성을 시작한 지 30일째인 16일 오후 광화문역 농성장. 시민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서명을 하고 있다.

 

"시민 여러분, 장애인을 낙인찍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해주십시오. 가난 때문에 사람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부양의무제 폐지해 주십시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광화문역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한 지 한 달이 흘렀다. 공동행동은 지난 8월 21일 광화문 역사를 원천봉쇄하고 중증장애인의 진입을 막았던 경찰과 11시간 동안 대치한 후에야 무기한 농성을 위한 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난 30일간 이곳 광화문역 농성장에서 시민에게 "'낙인의 사슬' 장애등급제, '빈곤의 사슬'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치며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였고, 각 당의 18대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들에게 10만인 엽서 쓰기 운동을 펼쳐왔다.

 

농성 한 달째를 맞이했음에도 19일 농성장은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천막 옆에 마련된 서명 대에서 활동가들은 지나가는 시민을 향해 지치지 않는 목소리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의 필요성을 알리며 관심을 호소했다.

 

그러나 광화문역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은 저마다의 삶과 개인의 문제에 관심이 쏠려 있을 뿐,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바쁘게 지나가다가도 장애인 활동가들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에 대한 설명을 듣거나, 서명에 참여하고 엽서를 쓰는 이들이 있어 활동가들은 쉬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외침에도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의 취지가 대중에게 한 번에 각인되기는 여전히 어려운 사안이다.

 

서명에 참여한 김병화(65세, 남) 씨는 장애등급제에 대해 잘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김 씨는 "사실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서명에 참여했다"라면서 "등급이 정해져 있어야 장애 정도가 심한 사람은 더 많은 서비스를 받고 장애 정도가 약한 사람은 조금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다시 한 번 장애등급제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에야 김 씨는 "등급제가 폐지되려면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알아야 하니 지금보다 정부가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라면서 "예산이 많이 들기 때문에 쉬운 문제는 아닐 것 같지만,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이 있다면 등급제를 폐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며 지지를 보냈다.

 

 

▲'수요일 수급자 권리 교실'을 진행하고 있는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조직국장.

 

서명전이 열리는 농성장 한쪽에서는 '수요일 수급자 권리 교실'이 열리고 있었다.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조직국장은 "이낙연 의원실에 따르면 현재 비수급빈곤 가구 중 54.5%가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매년 사람들이 죽음을 강요당해왔다"라고 전했다.

 

이어 김 조직국장은 "생존을 위협하는 것 이외에도 부양의무자 기준은 가난의 책임을 사회와 국가가 함께 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가족에게 떠넘기는 패러다임을 구축한다"라면서 "또, 지속해서 가족관계와 본인의 소득과 재산, 근로능력에 대해 평가를 받아야 해 수급자들은 스트레스와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김 조직국장은 "빈곤은 개인과 가족의 책임이 아니라 정부와 사회가 부담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라면서 "부양의무자 기준의 폐지를 통해 비수급빈곤층의 기초생활보장의 권리 실현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농성장에는 대구에서 올라와 무기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노금호 소장은 "시민의 반응은 뜨겁다고 할 수 없지만, 엽서를 쓰고 내용을 들으려고 하는 시민은 일단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 장애등급제나 부양의무제에 대해 잘 몰라도 설명을 해 드리면 취지에 공감하는 편"이라면서 "라디오에서 내용을 듣고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고 부양의무제 같은 경우 직접 경험했던 이들도 간혹 있다"라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노 소장은 장애등급제에 대해 "장애인들이 저마다 필요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등급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모순된 제도"라면서 "또한 기본적으로는 인권의 문제"라며 폐지를 촉구했다.

 

 

 

부양의무제에 대해 노 소장은 "제가 소득이 없었을 때 부모님께서 공무원이라 수급자가 되지 못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라면서 "복지는 가족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노 소장은 "대구지역에서도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고 많은 시민이 엽서쓰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라면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이고, 많은 예산이 수반되며 시스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이루어내기 어려운 사안이지만, 그래서 우리 활동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본다. 지치지 않고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밝혔다.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류재욱 소장.

 

장애인지역공동체 부설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류재욱 소장은 "많은 사람이 장애인등급제가 있어야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 않으냐고 물어본다"라면서 "그럴 때는 노인, 여성 등에 등급을 매겨 복지혜택을 제공하지 않는데 가축들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처럼 장애인에게만 등급을 매기고 있다고 이야기해준다"라고 설명했다.

 

류 소장은 "사람들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무관심한 경우가 많은데 비장애인일지라도 어느 날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일자리를 잃어 소득이 없어진다면 부양의무제는 자기의 문제가 될 것"이라면서 "대부분 바빠서 지나가지만 그중에서도 관심을 두고 질문을 하고 참여하는 이들 덕분에 우리의 투쟁이 힘을 얻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무기한 투쟁', 그것은 삶과 투쟁이 하나의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삶' 그 자체를 저항의 언어로 바꾸기 위해, 삶의 공간을 투쟁의 현장으로 옮겨 놓는 일이다. 광화문역을 지나다가 농성장에서 먹고 자며 세상을 바꾸려 목소리를 높이는 장애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며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는 것은 우리 삶의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혁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 혁명은 먼 미래에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불합리한 제도를 거부하고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농성장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의 일상 속에서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나가던 시민이 걸음을 멈추고 서명에 참여하고 있다.

 

 

▲농성장에 붙어 있는 호소문.

 

 

▲대구에서 올라온 장애인활동가들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촉구하는 문구가 적힌 카드를 들고 있다.



김가영 기자 chara@beminor.com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함께걸음]장애인 이동권, 이대로 묶이나

장애인 이동권, 이대로 묶이나 엘피지 가격급등...장애인 가계 '허리휘청' 2008년 06월 05일 (목) 09:31:08 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는 유가상승으로 인해 엘피지 가격도 1리터 당 1천원을 돌파한데 이어 추가 인상될 예정...

[함께걸음]쇠사슬에 수급비 횡령까지...장애인 개인운영신고시설 문제, 대안없나

쇠사슬에 수급비 횡령까지...장애인 개인운영신고시설 문제, 대안없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장애인 개인운영신고시설 대안모색을 위한 토론회' 개최 2009년 11월 16일 (월) 22:27:58 전진호 기자 0162729624@hanmail.net 인천 강화군의 한 장애인 개인운영...

[참소리]“장애인 콜택시 불편해서 못 타겠다”...전주시에 단체민원 제기 [18]

“장애인 콜택시 불편해서 못 타겠다”...전주시에 단체민원 제기 전북 장차연, "전주시 관리 소홀, 장애인 이동권 제약" 2013.01.29 16:59 입력 전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29일 오전 전주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주시 장애인특별운송사업에 대해 단체 ...

[비마이너] "수급탈락 할머니 두 번 죽인 복지부, 규탄한다" [25]

"수급탈락 할머니 두 번 죽인 복지부, 규탄한다" 공동행동, 복지부 알림석에 계란 던지며 강력 항의 복지부, "소득 자료는 사실이지만 최대로 공제한 사실은 빠져" 2012.10.25 15:19 입력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이 보건복지부 알림석에 계란을 던지며 항...

[비마이너] 일상 속에서 만나는 작은 '혁명' [90]

일상 속에서 만나는 작은 '혁명' 농성 30일째를 맞은 광화문역 농성장 대구 중증장애인 방문, 농성 이어가 2012.09.19 00:00 입력 ▲농성을 시작한 지 30일째인 16일 오후 광화문역 농성장. 시민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해 서명을 하고 있다. "시민 ...


오늘 :
119 / 351
어제 :
215 / 724
전체 :
567,206 / 18,832,329


XE Login